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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우씨(丹陽禹氏)의 연원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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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氏 自華東來説에 대하여(우씨가 중국에서 동국으로 왔다라는 설)

한국에 약 二五○개의 씨족(氏族)이 있어 七천만의 인구(人口)를 이루고 있고 각 씨족(各氏族)의 조상에 대한 연구(研究)가 근래(近來)의 학문적(學問的) 발달(發達)과 경제(經濟), 교통(交通), 정보(情報) 등의 발전에 힘입어 과거 어느 때 보다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성씨역사(姓氏歷史)를 보면 박(朴), 석(昔), 김(金),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 이(李)의 신라계(新羅系) 성(姓)과 왕(王), 장(張), 사(沙), 진(眞), 해(解) 등의 백제계(百濟系) 성(姓)과 을지(乙地), 손(孫), 을(乙), 예(禮), 주(周), 마(馬) 등 고구려계(高句麗系)의 성(姓) 등이 있었고 그것도 일부 귀족 등 극소수의 집안에서만 쓰여 졌다.

고려초기(高麗初期)부터 성(姓)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 관리계급은 성(姓)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고 고려 문종(文宗) 九년(一○五五)에는 성(姓)을 쓰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성씨(姓氏) 中 문종(文宗) 이후의 사람을 시조(始祖)로 하는 씨족(氏族)이 많이 있다. 이와 같이 문종 이후 성(姓)이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계급은 이조(李朝) 중기까지도 성(姓)을 쓰지 않았다.

우리 우씨(禹氏)는 일설(一説)에 의하면 시조(始祖) 휘(諱) 현(玄)께서 중국(中國) 농서(隴西 : 항화 상류지방, 협서성)에서 낳으시어(九二八) 농서(隴西)에서 도선국사(道詵國師, 八二七~八九八)와 알게 되어 중국에서 동쪽으로 와 단산(丹山)에 살으셨다고(唐明宗天成三年麗太祖十一年戊子生. 于隴西見智道詵 自華東來 居丹山) 하지만, 연대 등을 고찰(考察)할 때 타당한 근거가 없다.

또 일설(一説)에 우리 우씨(禹氏)는 요(堯), 순(舜), 우(禹) 시대의 우(禹)임금의 후예다라고 하는데 우(禹)임금은 기원전(紀元前) 二十二세기(世紀)의 일이고보면 우리 시조(始祖) 보다 약 三二○○년 전의 사람이니 연대(年代)에 문제가 있고 우(禹)임금의 우(禹)자는 시(諡 : 높여 부르는 호(號)), 이름은 문명(文命)이다. 아들은 계(啓)로 하왕조(夏王朝)를 세습하였다고 중국고대사에 적혀 있다. 지금으로부터 四○○○년 전이면 우씨(禹氏)의 인구는 중국, 한국에 걸쳐 현재 五○○만 이상이 되어야 된다는 추론이지만 이점에서도 학술적 근거가 희박하다.

덕수장씨(德水張氏), 평해황씨(平海黃氏), 절강편씨(浙江片氏), 화산이씨(花山李氏) 등과 같이 고려 이후에 귀화한 것이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고서는 우씨(禹氏)의 동래설(東來説)은 막연한 성사(姓史) 이전(以前)의 추측이고 이씨조선(李氏朝鮮) 시대의 모화사상(慕華思想)에서 나온 자존(自尊)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국토(國土)에 七○○○년 전 이전에도 토착인(土着人)이 살고 있었음은 많이 발견된 선사유적지(先史遺跡地)가 증명하고 있고 그 후 먼저 발달한 중국(中國)의 문화(文化)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고려조에 이르러 성씨(姓氏)가 보편화되고 그에 따라 우리 우씨(禹氏)도 득성(得姓)하게 되었다라고 보며 第六世 휘 중대공(仲大公)이 벼슬길에 오르자 정사(正史)에 우씨(禹氏)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족보에 나타나 있는 시조(始祖) 휘 현(玄) 이상의 조상을 찾기 불가능한 이상 우리 성씨(姓氏) 최상위(最上位)의 어른으로 모시고 동래설(東來説)은 전설적(傳説的)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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