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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종회

숭선각.jpg
​단양우씨 괴산 지동종중 재실 및 숭선각
사담리 사립전문학교.jpg
사담리 사립전문학교(1906~1925)
단양우씨 괴산 지동 종중

단양우씨 괴산지동
★재실










1~3은 구건물 4 현재 사용 건물

1.사리면내에서 가장 오래된 齋室(1~3) → 절대보존. 사리면 소매리 887. 888번지⟦단양우씨 재실. 숭선각⟧
입향(入鄕) 선조묘하(先祖墓下)에 연대미상(年代未詳) 건립(建立) 하였다가 기후(其後) 선조(宣祖 35年) 임인(壬寅
1602年) 2차, 철종(哲宗6年) 을묘(乙卯 1855년)에 3차중수(重修) 오늘에 이르고 있다
規模 : 팔간와우집八間瓦집(艹 + 咠)이며 중부(中部)에 사간(四間) 대청(大廳)이 있다.
(乙卯1855年 2月19日 巳時 子坐午向 上樑)
4) 현재 사용하고 있다(1999. 10. 23 신축 준공식)
1 현존 2 비존 3현전 哲宗6年乙卯4 현재 사용(1999년 신축)















★崇先閣 : 檀紀4322年己巳(1989年)에 建立 每年(陰)10月 10日 享祀 時에 諸孫이 咸集하여 奉祀하고 있다.
位置 : 忠北 槐山郡 沙梨面 笑梅里 888 889(池洞)
規模 :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 배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崇先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三門 : 정면3칸 측면1칸의 맛 배 기와지붕으로 된 소슬삼문 형식으로 昌池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崇先閣上樑文: 禹潭이 지음. (己巳1989年 5月 13日 午時上樑)
門長 : 禹顯玉(1916∼2008) 門老 : 禹潭(1908∼1992)
總務 : 禹景澤(1924∼1991) 施工 : 趙光熙 숭선각에서 제향을 받드는 선조 위 총 23위

★ 지명의 유래 : 입향 선조이후 지동(池洞)이라는 지명(地名)의 유래가 연못(潭)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지동(池
洞)으로 불리어 오늘에 이르며 창지문(昌池門)으로 명명(命名)하게 된 것도 여기에서 연유(緣由)한다.
3 삼문 2 숭선각 1 전경 6 창지문 5 숭선각 4 전경

괴산군(槐山郡) 사리면(沙梨面) 사담(沙潭)에 입향조(入鄕祖)가 습독공(習讀公)[휘 계근(諱 繼勤 1416~1487)]이시며 묘소(墓所)의 위치(位置)가 지동(池洞) 삼마장(三馬場) 소매리 산 112번지에 있다. 그 후손(後孫) 또한 묘소가 소매리 산 112번지에 산재(散在)해 있으며 매년(每年) 후손들이 모여 시향(時享)을 봉행(奉行)하고 있고 선조(先祖)께서
하신 말씀 즉 유훈(遺訓)과 유풍(遺風)을 잊지 않고 유지(遺志)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담리 마을 유래비 및 단양우씨 유지











★선대 산소(유택) : 사리면 소매리 산 112 번지
1)현령공(縣令公)(휘 원자. 기자. 諱 元琪)의 단(壇)단을 설치한 이유 : 현재 산소의 위치가 휴전선 내에 위치함으로 인해 부득이 괴산 지동에 단을 설치함 [산 112]현령공 : 안정공(安靖公 諱 洪康) 아드님 7형제분 중 셋째
2)습독공(習讀公) (휘 계자. 근자. 諱 繼勤)현령공의 7남매 중 첫째 아드님 [산 112]











3)부사직공(副司直公) (휘 서자. 장자. 諱 瑞長)습독공의 4남매 중 첫째 아드님 [산 112]
4)졸은공(拙隱公) (휘 서자. 부자. 諱 瑞敷)습독공의 4남매 중 셋째 아드님 [산 112]











5)증 금부 도사공(贈 禁府 都事公 휘 영자. 좌자. 諱 英佐)졸은공의 남매 중 아드님 [산 112]
6)장락원 주부공(掌樂院主簿公 휘 순자. 신자. 諱 舜臣)도사공의 두 아드님 중 첫째 아드님 [사리면 수암리 산44-2]


 
 
 
 
 
 
 




7)비계공(秘溪公 휘 순자. 민자. 諱 舜民)도사공의 두 아드님 중 둘째 아드님 [산 112]
8)군자감봉사공(軍資監 奉事公 휘 정자. 규자. 諱 廷珪)비계공의 네 아드님 중 둘째 아드님 [산 112]










사담리 금석문
서암정 : 西巖亭 崇禎 辛巳 七十四(1701년) 서암거사 우필성[西巖居士 禹弼聖(1652~1730)] 선조와 관련이 있다
장소 : 사리면 사담리 산 42












호암(虎巖)에 새겨진 금석문 
장소 : 사리면 사담리 산 28-1번지 9부 능선 ~ 정상


연원화숙 설립자와 관련이 있는 분과 주인성명













          참고 『괴산군지』. 『괴산향교지』. 『조선환여승람』

★虎호巖암 記기
괴지서산야(槐之西山也), 산지상석야(山之上石也). 석개뢰뢰방박(石皆磊磊磅礡), 혹애혹간(或崖或磵), 여만석정(與萬石
亭), 총취상백중(叢翠相伯仲), 위북망이백마(爲北望而白馬),표묘압출어운소자(縹緲押出於雲霄者), 송령야(松嶺也). 동망이
제봉(東望而諸峰), 완연위사(豌蜒委蛇), 신타병읍(申拖並挹),불고불저(不高不低), 약근약원(若近若遠), 남주이위상당산성자
(南走而爲上黨山城者), 보강야(寶崗也). 중유일곡벽(中有一谷闢), 이위야(而爲野), 심이위촌(尋而爲村), 기왈소매야(其曰笑
梅也), 기왈대기야(其曰大基也), 기왈사담야(其曰沙潭也). 즉촌지노대자(卽村之老大者), 이산천요조(而山川窈窕), 상마회원
(桑麻薈菀), 여은여노(如隱如露), 서기유충신재덕지인(庶幾有忠信才德之人), 출어기간(出於其間). 세재(歲在) 정사춘(丁巳
春), 여통적기간(予通適其間), 소영호천석지간(嘯咏乎泉石之間), 일일주인(一日主人), 수요여(遂邀余), 이작호암지유(而作虎巖之遊), 강이노부지흥(强以老夫之興), 이강책종위입기곡(而强策從爲入其谷), 이산주습령좌삼우열(而山楱濕苓左森右列),척기아(陟其阿), 이연란총주전(而然蘭叢柱前), 창후응불수리이심언(唱後應不數里而潯焉). 진기암재사담상제일봉두(盡其岩在沙潭上第一峰頭), 기복야여토(其伏也如兎), 기비야여조(其飛也如鳥), 기창야여수(其蹌也如獸), 기반야여룡(其盤也如龍), 이약기제명두각이(而若其題名頭刻已). 위주인옹호전지장점의(爲主人翁好田地粧點矣). 수연만산중석지간(雖然萬山衆石之間),부지하암위호야(不知何巖爲虎也). 지점량구이수득언(指點良久而遂得焉). 내계축년춘(乃癸丑①年春), 여금계양재제공등림차(與錦溪②陽齋③諸公登臨此), 이소영지지야(而消咏之地也). 연칙문일지유(然則問日之遊), 부지호암지위호암(不知虎岩之爲虎岩), 이심상과료자야(而尋常過了者也). 금일지유(今日之遊),욕견호암지위호암(欲見虎岩之爲虎岩), 이욕심기진면목자(而欲潯其眞面目者), 칙감불명언(則敢不明言), 직지이식호암지전말여(直指以識虎岩之顚末歟). 부지당초석명자(不知當初錫名者),하인이필유이언(何人而必有以焉). 호자산군야(虎者山君也), 은이유부우지세(隱而有負隅之勢), 출이유병위지문(出而有炳煒之文), 기섭불가도(其燮不可度), 기위불가압(其威不可狎), 은어자산지상(隱於玆山之上), 이가금(而呵噤), 불상옹호(不祥擁護), 진정장대기시(眞精將待其時), 칙후필유택모(則後必有澤毛), 칠일지로(七日之露), 장소만리지풍의(長嘯万里之風矣).기기상역가흠(其氣像亦可欽), 이가상수비신이복로(而可尙遂飛身而復路), 진일대백어송음지하(進一大白於松陰之下), 이사주인왈석루견기어인(而謝主人曰昔婁見其御人), 삼년부지기면급기고소야(三年不知其面及其告掃也). 견기긍이지기어인(見其肯而知其御人), 내인이갱도금오어유사(乃引而更道今吾於遊斯),부지루지삼년(不止婁之三年), 이단견기면(而但見其面), 불견기긍(不見其肯). 고거어호암지하(故居於虎岩之下), 이부지호암지재기상(而不知虎岩之在其上), 금시지기면(今始知其面), 이우견기배후지등(而又見其背後之登), 시암자(是岩者), 필선종기배이기지부(必先從其背而記之夫).
소운(少雲) 한성이(韓星履 1850~1926) 근찬(謹撰)
「호암기(虎巖記)」 번역
괴산의 서쪽에 있는 산이며, 산 위에 있는 돌이다. 돌은 모두 줄을 이어 무더기를 이루어, 혹은 절벽도 있으며 혹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도 있으며 만석정(萬石亭)과 더불어 우거진 푸른 숲이 백중지세(伯仲之勢)이다.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백마산(白馬山)1)이 아득한데 구름이 낀 하늘에 우뚝 솟아난 것이 송령(松嶺: 송오리고개)이다.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여러 봉우리가 구불구불 이어져 펼치기도 하고 당기기도 한 것 같으며 아울러 떠 있는 것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며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멀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남쪽으로 산줄기가 달리어 상당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은 보강산(寶崗山)2)이다. 가운데 하나의 골짜기가 있어 열리니 들이 되고, 인하여 촌락이 되니, 소매리(笑梅里)라 하고, 대기리(大基里)하며, 사담리(沙潭里)라 한다. 즉 촌
락이 오래되고 큰 것은 산천이 아늑하고 조용하며 뽕나무와 삼대가 무성하여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드러나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거의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재주와 덕망이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는 정사년(丁巳年: 1917년) 봄 내가 마침 그 사이에 놀러가서 샘물과 돌 사이에서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조리는데 하루는 주인이 드디어 나를 맞아
호암에서의 놀이를 만들어 강력하게 노부(老夫)의 흥취거리로써 그 골짜기로 따라 들어가니, 산에 개암나무가 무성하고 축축하게 젖은 원추리가 왼쪽에
빽빽하고 오른쪽에 줄지어 나있고 그 언덕에 올라가니 그윽한 난초와 총총한 계수나무가 앞에서 창을 하고 뒤에서 호응하기를 몇 리가 안 되게 얻을 수 있다.

1)백마산(白馬山):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송오리와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경계에 있는 산.465m.
2) 보강산(寶崗山):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괴산군 소수면 소암리 경계에 있는 산. 539m. 보광산(普光山) 보광산(寶光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산 정상부에 괴산 봉학사지 오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29)이 있다.


대개 그 바위가 사담 위쪽 제일 높은 봉우리에 있으니 그 엎드려있는 것이 토끼 같으며 날렵한 것이 새와 같으니 그 춤추어 움직이는 것이 짐승 같기도 하고 그 서려있는 것이 용(龍)같기도 하니 그 이름을 새겨놓은 것 같기도 하다.
주인옹이 논밭을 좋아하여 단장했다. 비록 그러나 많은 산과 여러 바위 사이에 어느 것이 호암인지 알지 못했는데 그 지점을 참으로 오래되어 드디어 얻었다. 이에 계축년(癸丑年: 1913년) 봄 금계(錦溪) 양재(陽齋)1) 여러분과 이곳에 올라 소일하고 시를 읊조리는 장소로 삼았다. 그러나 즉 저번 때 노닐 때 호암을 왜 호암이라 하는지 알지 못하여 심상하게 지나쳐버렸다. 금
일 노닐 때 호암을 호암이라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하고 그 진면목을 터득하자 하니 즉 감히 분명히 말할 수 없으나 곧바로 지적하여 호암의 전말을 알게 하고자 할지다. 당초에 호암이라는 이름을 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 반드시
까닭이 있다. 범은 산의 임금이니 숨어서 모퉁이를 등지고 있는 형세인데 나오면 번쩍이고 빛나는 무늬가 있으며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위엄은 누를 수 없는데 이산 위에 숨어 상서롭지 못한 것을 꾸짖고 입 다물며 참된 정기(精氣)를 옹호하여 장차 그때를 기다리니, 즉 나중에 반드시 털을 윤택하게 하여 7일에 드러내 말리에 바람을 길게 분다. 그 기상이 또한 흠모
할 만하고 숭상할 만하다. 드디어 몸을 뒤쳐 길을 회복하여 소나무 그늘 아래서 하나의 큰 술잔을 드리며 주인에게 감사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여러 번 그 어인[御人: 말을 모는 사람]2)을 보았는데 3년 동안 그 얼굴 및 그 돌아가겠다고 한 말을 알지 못했다. 그 등을 보고 그 어인[말을 모는 사람]을 알아보니 이로 인하여 다시 말하노니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노는 것이 그치지
않고 3년인데 그 얼굴을 보고 그 뒤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호암(虎岩) 아래 살면서 호암이 그 위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지금 비로소 그 얼굴을 알고 또 배후로 이 바위에 올라간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으니 반드시 먼저
그 등을 따라 그것을 기록한다.
소운(少雲) 한성이(韓星履 1850~1926) 근찬(謹撰)

1) 朴玟鉉(1855~1917) : 順天人. 字可遠. 號陽齋. 乙卯(1855年)6月19日生. 丁巳(1917年)2月20日卒. 毅堂 朴世和 門人. 居陰城. 中立和塾賓長(癸丑1913年4月23日) ← 錦溪 李根元(全州人) 中立和塾 講學 時.
2) 어인(御人): 말을 모는 사람. 왕량은 조간자(趙簡子)의 어인(御人)이고 조보는 주 목왕(周穆王)의 어인으로, 모두 고대의 이름난 말몰이이다. 조보는 목왕이 서쪽으로 가서 수렵에 빠져 돌아오길 잊었는데, 서언왕(徐偃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가 왕의 말을 몰아 하루에 천 리를 달려가 서언왕을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그 공으로 조성(趙城)을 받았다고 한다. 『史記』 卷43「趙世家」.






































괴산 최초 사립전문학교(연원화숙) 설립에 관련된 논문 사립전문학교(연원화숙 전경 및 수학생)
易雲 禹顯鼎 塵纓 石泉 遺墨玉泉 禹亨植 遺墨 鶴山 鄭寅杓 遺墨 玉泉 禹亨植 遺墨 ? 遺墨
白雲堂 遺墨 錦溪 李根元 遺墨? 遺墨 錦溪 李根元 遺墨錦覺 李憲鑄 遺墨

장소 : 사담리(모래못) 255번지
설립한 분 : 易雲 禹顯鼎(1871~1935) 禹錫圭(1882~1909).
禹錫東(1853~1938). 禹顯武(1886~1924).
운영 : 1906년 ~ 1925년이후 중단[왜인(倭人)에 의해] 그러나 이후(1945 ~1965년까지 유지
수학생 : 350여명(화서 연원록 참고)

Ⅰ. 우현정의 업적
1). 인용된 논문: 이상주, 「우인규(禹仁圭)의 『애감록(哀感錄)』에 대한 고찰」,『온지논총』제50집, 온지학회, 2017, 35~93면. 한국연구재단 등재지 [KCI]
[논문 부분 인용]
애감록(哀感錄)』의 저자 우인규(禹仁圭. 1896~1967)는 우현정(禹顯鼎.1871~1935)의 3남중 셋째 아들로 학문이 뛰어나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자는 찬경(贊卿), 여안(汝安). 호는 원정(園丁), 성재(誠齋), 물암(勿菴)이다 병신년(丙申年. 1896년) 5월 9일 지금의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290번지에서 태어나 정미년(丁未年. 1967년) 3월 8일 졸했다. 연원화숙(淵源和
塾) 즉 중립화숙(中立和塾)에서 여러 스승께 수학했다. 즉 지운(芝雲) 주채기(周采驥), 강암(剛菴) 최상룡(崔翔龍. 1873~1937), 예곡(蘂谷) 김금룡(金金龍), 일와(一窩) 윤정학(尹正學. 1867∼1933), 소운(少雲) 한성이(韓星履.1850∼1926), 회당(晦堂) 윤응선(尹膺善. 1854∼1924)에게 수학했다. 우현정과 우인규는 우암학맥을 계승한 화서학파(華西學派)인물들과 적극적으로 교유했다. 저술에 『물암유고(勿菴遺稿)』가 있다. 여기에 「사담숙훈(沙潭塾訓)」, 「중립화숙기(찬)中立和塾記(贊)」, 「쌍천기(雙泉記)」, 「공맹재기(孔孟齋記)」, 「 학공맹재찬(學孔孟齋贊)」, 「단양우씨정문기(丹陽禹氏㫌門記)」, 「소보강산기(小寶崗山記)」, 「화은당기(華隱堂記」), 「화양동기(華陽洞記)」, 「물암기(勿菴記)」등이 수록돼있다. 1925년 연원화숙이
폐교되었으나 우인규는 1945년이후~1965년 까지 연원서당에서 강학했다. 우인규가 『애감록』을 저술하게 된 가문과 학문적 배경을 알아보자. 우인규와 그 아버지 우현정(禹顯鼎. 1871~1935)은 일제강점기 교육보국의 정신을 견지한 유학자요 교육자였다. 우현정(禹顯鼎. 1871~1935)은 1905년 11월 6품 승훈랑(承訓郞)3)으로 진급했다. 우현정은 1906년 충북 괴산군 사리

3)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5) 9월 28일. “李容冕을 군부 주사에 임용하고, 鄭泰
源, 權中集을 충청남도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禹顯鼎을 함경북도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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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사담리 255번지에 ‘연원화숙(淵源和塾)4)’을 설립했다. 우현정(禹顯鼎.1871~1935)이 주도하여, 1884년 8품 통사랑(通仕郞)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 우석규(禹錫圭. 1852~1909)5), 우석동(禹錫東. 1863~1938),1901년 행관내부주사(行宮內府主事)를 역임한 우현무(禹顯武. 1886~1924)6)등과 함께 설립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 휘문의숙(徽文義塾)과 숙명학교(淑明學校)가 설립되었다. 두 학교와 같은 해 연원화숙을 설립했으니 그들은 시대사조에 민첩하게 부응병진한 선각자요 애국자이다. 우현정등이 자기 고향에 연원화숙을 설립하게 된 외적 요인은 그가 서울에 자주 왕래하고 관직에 있
었기 때문에 국내외 정국에 대한 첨예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원화숙을 주도적으로 설립한 우현정은 연원화숙의 설립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오륜(五倫)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선비를 교육하는데 힘쓰고자하는 것은 세상의 표준(標準)이요, 나라의 원기(元氣)이다. 어떤 성씨를 막론하고, 만약 배움을 향하는 마음이 있으면 본교에 와서,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날마다 배움에 힘쓰는 것을 새롭게 하여 각자 공성(功成)을 다하고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하여 일심(一心)으로 임금을 섬기고, 종신토록 나라에 충성하여, 국태민안하고, 사방이무사(無事)한 즉 어버이에 영광이며 어버이께 효도하니 이름이 천추에 전하『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5) 10월 1일. “咸鏡北道觀察府主事 禹顯鼎의 本官을
依願免職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42년 을사(1904, 광무8) 10월 1일. “慶基殿을 개수할 때의 監董 별단과 관련하여 조령을 내리기를, “本殿의 令 徐讚洙, 참봉 金泰鉉은 모두 陞六하라 9품李斗爀 …禹顯鼎…는 모두 승륙하라.”

4) 禹顯鼎, 「蓮洞學校規則」, 『易雲集』. 「蓮洞學校規則」에 校長, 校校務長, 學務員, 掌財, 事務員, 使喚, 校監, 贊成員 직책과 직원의 조직도를 작성했다. 文理學, 作文學, 禮文學, 法律學, 算術學,各語學 등 수강해야할 과목도 설정했다. 입학지원서 양식도 작성했다. 그 외에도 화숙 운영에 필요한 제도를 마련했다. 연원화숙은 1906년 창립 당시부터 조직과 체계가 상당히 잘 정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현정이 연원화숙을 창건한 이후 1912년 3월 26일 忠淸北道長官 正五位勳四等 鈴木 隆이,우현정이 뜻있는 사람과 협의하고 사재를 출연하여 서당을 개설하고 敎鞭을 몸소 실행하여 일신을 육영사업에 바친 것에 대해, 표창하는 뜻을 전하는 문서를 보내왔다. 연원화숙에서 배출된 인원은 우현정의 문하생 문인록에 등록된 인물만 271명이다. 1925년 폐교했으나, 그 아들 우인규가 이후 1965년
까지 강학했다. 연원화숙 건물은 1968년까지 사담리 255번지 그 자리에 존재했으나 노후되고 소용없게 돼 철거했다. 그 교육보국의 정신은 오늘에 되살려 문화선진 대국을 선도할 인재를 양성해야 할 것이다. 李相周,「日帝 强占期 玉藻氷壺․ 萬東廟碑 拓本에 관한 考察」,『괴향문화』 제20집, 괴산향토사연구회, 2012, 97~130면.
5) 『승정원일기』, 고종 21년 갑신(1884, 광서10) 6월 10일(임오). “이정래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선공감 가감역관 鄭海完ㆍ李源晉ㆍ禹錫圭는 모두 신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6)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5) 11월 20일(임오). “통신사 전화과 주사에 劉在鳳, 權昌浩, 朴基善, 禹顯武를 임용하고”『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5) 11월 21일(계미). “비서원 승 沈定燮, 恭陵參奉 朴齊興, 通信司電話課主事 朴基善ㆍ禹顯武ㆍ…朴準孝의 본관을 의원면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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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 이 어찌 면학의 효과가 아니겠는가. 아, 방년(芳年)의 사람들은 다행히 이 뜻을 받아들여, 마음에 새기고 뼈에 아로새겨라. 1906년 7월 15일”7) 우현정이 1906년 ‘연원화숙’을 설립한 궁극적인 목적은, 일제강점기에 전통 유학을 교육해 충효정신등 전통윤리와 가치관을 계승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조짐이 농후해가는 시기에 동심동력(同心同力)하고, 위기를 지켜 나라를 구하고 가국(家國)을 보호하고 서민(庶民)을 편안히 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우현정은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 1834∼1910), 일와(一窩) 윤정학(尹正學. 1867∼1933), 소운(少雲) 한성이(韓星履. 1850∼1926),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 1840∼1918), 회당(晦堂) 윤응선(尹膺善. 1854∼1924), 청담(淸潭) 송소용(宋炤用. 1864∼1946)과 교유하였으며 이들 중 대다수는 연원화숙에서 강학을 했다.
우인규는 연원화숙 문하생들과 1914년 일와 윤정학 선생과 그 아버지 우현정을 모시고 화양구곡에 가서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참배했다. 윤정학(尹正學)은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제자이며 함께 항일운동을 했다. 이때 화양동 바위에 새겨놓은 암각문중에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과 관련된 ‘비례부동(非禮不動)’ ‘옥조빙호(玉藻氷壺)’와 ‘만동묘비(萬東廟碑)’를 탁
본하게 했다8). 이렇게 한 것은 스승들과 아버지의 교훈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우현정은 「화양구곡시(華陽九曲詩)」9)를 지었는데, 이는 괴산군 출신이 지은 현존 유일의 화양구곡시이다. 우인규도 「화양동기(華陽洞記)10)를 지었
는데, 이도 괴산군 출신이 지은 현존 유일의 화양동기이다. 이렇듯 우암학맥 후인들은 화양동이 숭명(崇明)과 관련하여 의리정신(義理精神)과 배청의식을 고취 앙양할 수 있는 일종의 성지(聖地)로 인식하고 있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인규의 학통과 아버지의 교훈이 『애감록(哀感錄)』을 작성기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음 『애감록(哀感錄)』 천책(天冊)에 실린 서문격인 글을 살펴보기로 하자.

7) 禹顯鼎, 『易雲集』, 「蓮洞學校刱建序」.
8) 李相周, 「日帝 强占期 玉藻氷壺․ 萬東廟碑 拓本에 관한 考察」,『괴향문화』 제20집, 괴산향토사연구회, 2012, 97~130면. 李相周, 『화양구곡에 새긴 조선ㆍ明나라 임금 암각글씨 탁본 특별전』, 중원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2015, 1~78면.
9) 李相周, 『충북의 구곡과 구곡시 - 선인의 길을 따라 한시와 자연속으로-』, 忠北學硏究所, 2007, 1~310면.
10) 李相周, 「朝鮮 後期 山水評論에 대한 一考察-華陽九曲을 중심으로-」,『한문학보』제14집, 우리한문학회, 2006, 215~2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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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애감록(哀感錄)』 천책(天冊)에 실린 서문격인 글을 살펴보기로 하자. 오호(嗚呼)!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은 망극하고 망극하다, 애통하여 꺾이고 찢어지니 아버지 종중(宗中)의 일로 서울에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졸지에 거창(巨創)함을 당하여 힘쓰는데 두서가 없고 조치할 바를 알지 못했다. 다행히 종중의 여러 어른들과 연원화숙(淵源和塾)의 여러 선비들의 도움을 입어 호상소(護喪所)를 설치하고, 낮을 이어 밤에 이르렀다. 상중의 여러 가지 일,위문하는 의(義), 부의(賻儀)를 보낸 은혜, 비교할 수 없는 슬픈 감정을 모두 기록하여 진실로 이는 종신토록 잊기 어려워, 집안에 전해 기념할 만하다.
그래서 지금 모아 묶어 실제대로 기록한다.11)

2. 현존 괴산군 최초의 「화양구곡시」 창작
1). 인용된 저서: 이상주, 『충북의 구곡과 구곡시』, 충청북도 충북학연구소, 2007, 1~310면.
2). 인용된 서책: 괴산군지편찬위원회,「문학유산-문학 속 괴산의 역사와 자취」, 『괴산군지』 3, 2013, 365~367면. 우현정의 「화양구곡시」【우현정(禹顯鼎1871~1935):근차화양동구곡원운(謹次華陽洞九曲原韻)12).1914년작】 근차화양동구곡원운(謹次華陽洞九曲原韻). 절구(絶句). 갑인 추 칠월 일(甲寅 秋 七月 日). 역운(易雲).『역운집(易雲集)』.화양동구곡원운(華陽洞九曲原韻)에 삼가 차운함. 절구(絶句)로 지음. 갑인(甲寅 1914년) 가을 칠월 일. 역운(易雲)이 읊음
화양 구곡 시(1~3)














11) 禹仁圭, 『哀感錄』, 天. “嗚呼! 祖母喪事罔極罔極, 哀痛摧裂, 而父主, 以宗事, 在京未還, 猝當巨創辦無頭緖, 罔知所措.幸蒙宗黨諸丈, 與和塾多士, 設護喪所, 連日達夜. 悉記喪中諸事, 其慰問之義, 賻儀之恩, 哀感無比 而誠是終身難忘, 可以傳家紀念. 故今頗蒐揖, 以爲實錄焉.”
12) 2004년 1월 4일 일요일, 우구원(禹九源 1957[원출생연도] ~ )과 청주시 개신동 윤희빈씨 집에 자료조사차 들렀다. 이때 그가 가져온 필사본에서 확인했다. 우구원은 우현정의 증손자이다.











 
 
 
.                                    현존 3년상(1918~1920년) 종합기록일지 『애감록(哀感錄)』 기술
1). 인용된 논문: 이상주, 「우인규(禹仁圭)의 『애감록(哀感錄)』에 대한 고찰」,『온지논총』제50집, 온지학회, 2017, 35~93면. 한국연구재단 등재지[KCI]
「2019 지방문화원의 날」 특별상 수상작】 『애감록(哀感錄)』 게재에 대하여 「2019 지방문화원의 날」 특별상[국가기록원장(이소영)상] 수상작으로 우인규가 기술한 『애감록(哀感錄)』 이 선정됐다. 괴산문화원의 경사요 유서깊은 문화의 고장 우리 괴산군의 영광이다. 따라서 군민이 문화재에 대한 애호심을 더욱 높이는 계기로 삼고 그 내용을 알리고자 그에 대한 논문을 수록한다.

우인규(禹仁圭)의 『애감록(哀感錄)』에 대한 고찰

이상주(李相周)1))
Ⅰ. 머리말
Ⅱ. 우인규(禹仁圭)의 가학(家學)과 『애감록(哀感錄)』 저술(著述)의 배경
(背景)

1) 이상주: (사)괴산향토사연구회 회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2018년 2월 28일 퇴직]. 괴산군 사리면 화산리 도촌 출생 거주. 22sangju@hanmail.net. 010-4424-3390
Ⅲ. 『애감록(哀感錄)』의 체제와 수록된 내용
Ⅳ. 『애감록(哀感錄)』 소재(所載) 애제류문(哀祭類文)의 문학적(文學的) 교훈적(敎訓的) 의의(意義)
Ⅴ. 일화(逸話) 및 당시 실상(實相)의 일면(一面)
Ⅵ. 맺음말.
이 논문은 <고전시대 죽음관과 죽음의식>(2016.11.5.) (사)온지학회 전국학술발표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상주, 「우인규(禹仁圭)의 『애감록(哀感錄)』에 대한 고찰」,『온지논총』제50집, 온지학회, 2017, 35~93면. KCI
〈국문요약
우인규(禹仁圭. 1896~1967)의 『애감록(哀感錄)』은 그의 할머니 영월엄씨 (寧越嚴氏. 1850∼1918)가 별세한 1918년 음력 7월 18일부터 1920년 10월5일 길제(吉祭)를 지낼 때까지의 전 과정을 천(天) 지(地) 인(人) 3책에 기록한 ‘영월엄씨삼년상종합보고일지(寧越嚴氏三年喪綜合報告日誌)’이다.
중략
우인규의 『애감록(哀感錄)』은 1918~1920년으로 일제강점기이다. 이제껏 점검한 결과 학계에 보고된 애감록 중에는 우인규의 『애감록(哀感錄)』과 같은 체제로 작성한 애감록은 거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우인규의 『애감록(哀感錄)』을 구체적으로 천착하여 그 문헌 자료적 가치와 애제류문학적(哀祭類文學的)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애감록(哀感錄)』은 1918년 당시까지 전통 상례를 고수했던 괴산지역유림 가문의 상례에 대한 전모를 생생하게 동영상을 보듯이 연상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우인규와 그 아버지 우현정은 일제강점기에 쇠퇴해가는 충효정신을 ‘연원화숙(淵源和塾)’ 문생(門生)은 물론 지역민들에게 고취앙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유례가 없는 『애감록(哀感錄)』이라는 3책의 기록을 남겼다. 이렇듯『애감록(哀感錄)』은 학식있는 유림들의 시대적 사명을 각성할 수 있는 자료이다.
우현정이 1906년 ‘연원화숙’을 설립한 궁극적인 목적은, 일제강점기에 전통 유학을 교육해 충효정신등 전통윤리와 가치관을 계승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조짐이 농후해가는 시기에 동심동력(同心同力)하고, 위기를 지켜 나라를 구하고 가국(家國)을 보호하고 서민(庶民)을 편안히 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제껏 살펴보았듯이 『애감록(哀感錄)』은 일화(逸話) 및 당시 전통적 상례풍속(喪禮風俗)과 사회풍속, 지명의 변천 등 당시의 세태풍속을 알 수 있다. 또한 『애감록(哀感錄)』에 수록된 만사, 위장, 제문의 내용을 통해 일제강점기인 1918~1920년의 애제문의 한 특징을 고찰했다. 아울러 쇠퇴해가는 효행심을 회복 진작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당시 우현정 가문에서 오륜행실도를 통해 전통윤리교육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애감록(哀感錄)』은 그 교훈적 문학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오륜행실도 : 五倫行實圖(5券5冊. 1859년 刊行本)사담리 선돌 및 보호수(1 괴산 78호. 3 괴산 77호)







사담리 선돌 및 보호수(1 괴산 78호. 3 괴산 77호)








효자 우효동 정여문(孝子 禹孝東 1861~1887 旌閭門)


































                                학산(鶴山)정인표(鄭寅杓 1855~1935) 遺墨. (1~10 癸丑(1913年)淵源和塾에서 씀)







































“익일(翌日), 선생정의관(先生正衣冠), 이솔기제자오십의관(而率其弟子五十衣冠),선알 만동묘신의이종지위후(先謁 萬東廟神毅二宗之位後), 퇴알우암수암양선생영정(退謁尤菴遂菴兩先生影幀), 즉위의지엄연(則威儀之儼然), 기상지외연(氣像之巍然),약생존지승견자야(若生存之承見者也). 략관이퇴(略觀而退), 기용경운소자(其聳擎雲霄者), 낙영산야(落影山也). 시산지록(是山之麓), 즉만동묘건축지지야(卽 萬東廟建築之地也), 이시묘지건축자(而是廟之建築者), 즉우암선생야(卽尤菴先生也). 차시추모성왕지의야(此是追慕聖王之義也). 고효종지시(故孝宗之時), 선생거어시산지하암서재(先生居於是山之下巖棲齋), 강구선성지서(講究先聖之書), 이항념신의지의(而恒念神毅之義), 부조종지병(扶朝宗之柄), 이승연원지맥(而繩淵源之脈), 한지문장(漢之文章), 송지제현(宋之諸賢), 막급어우암부자야(莫及於尤菴夫子也). 지여시문명(地如是文明), 이산여시줄위(而山如是崒蘶), 인여시탁고(人如是卓高), 즉후인모현자(則後人慕賢者), 숙불일왕이완감야(孰不一往而玩鑑也). 숙불일거이봉심재(孰不一去而奉審哉). 지가위대명건곤(地可謂大明乾坤), 이역가위강상소수지지야(而亦可謂綱常所樹之地也). 연즉선생지덕(然則先生之德), 익고어영산지고(益高於影山之高), 선생지의(先生之義), 익명어일월지명야(益明於日月之明也). 고선생지덕여시(故先生之德如是), 선생지의여사(先生之義如斯), 이화양지명익저어후세(而華陽之名益著於後世), 즉무이지위무이(則武夷之爲武夷), 하가어차재(何加於此哉). 어운지지불위심상자(語云地之不
爲尋常者), 필위비상인지지야(必爲非常人之址也). 고지득기인(故地得其人), 이후명고(而後名高), 인득기인(人得其人), 이후지고자(而後志高者), 정위차야(正謂此也). 시이 유여시(是以有如是), 화양지영지(華陽之靈地), 연후 유여시(然後 有如是), 선생지덕의(先生之德義), 즉고운인걸지령자(則古云人傑地靈者), 비차지위여(非此之謂歟). 화양지위산천(華陽之爲山川), 무비위선생이연야(無非爲先生而然也). 고경벽지위경벽(故擎壁之爲擎壁), 영담지위영담(影潭之爲影潭), 사담지위사담(沙潭之爲沙潭), 궁암지위궁암(弓巖之爲弓巖), 성대지위성대(星臺之爲星臺), 운대지위운대(雲坮之爲雲坮),학소지위학소(鶴巢之爲鶴巢), 용암지위용암(龍巖之爲龍巖), 파곶지위파곶(巴串之爲巴串), 무비위선생이저물형언자야(無非爲先生而著物形言者也). ”이튿날 선생1)이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제자 50의관(衣冠)을 인솔하여 만동묘(萬東廟)2)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3) 두 황제의 신위(神位)를 배알한 후에, 물러나와 우암(尤庵)4)선생과 수암(遂菴)5)선생의 영정을 배알 했는데,위의가 엄연하고 기상이 위연해서 생존 시 받들어 뵙는 것 같았다. 대략 관람하고 물러나오니, 구름 낀 하늘에 솟은 듯 떠받치고 있는 것이 낙영산이라. 이 산의 기슭이 만동묘가 건축된 땅이 있는데, 이 묘를 건축한 사람이 즉 우암 선생이라. 이는 성왕(聖王)의 의(義)를 추모한 것이다. 그래서 효종 때에 선생이 이산 아래 암서재에 거처하며, 선대성인(聖人)의 서적을 강구(講究)하며,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의리를 항상 생각하고 조종(祖宗)이 자루를 붙잡은 것이니, 연원(淵源)의 맥(脈)․한(漢)의 문장(文章)․송(宋)의 여러 현인(賢人)들을 이었으나 우암부자(尤庵夫子)6)에 미치지 못했다. 땅이 이와 같이 문명(文明)하고 산이 이와 같이 높고 사람이 이와 같이 뛰어나고 높으니, 즉 현인을 흠모하는 후인이 누가 한번 가서 완감(玩鑑)하지 않으며, 누가 한 번 찾아가서 받들어 찾지 않으리요? 대명일월(大明日月)이라 할 만하며 강상(綱常)을 세운 곳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선생의 德이 더욱 낙영산이 높은것 보다 높고,선생의 의(義)가 해와 달이 밝은 것보다 더욱 밝다. 그래서 선의의 덕(德)이 이와 같으며 선생의 의(義)가 이와 같아, 화양의 명성이 후세에 드러나니, 즉 무이가 무이가 된 것이 어찌 이곳보다 더 하겠는가? 통상적으로 하는 말에“땅이 심상치 않게 되는 것은, 반드시 범상치 않은 사람의 터가 되기 때문이다.”라했다. 그래서 그 사람다운 사람을 얻은 후에 이름이 높아지고, 사람은 그 사람다운 사람을 얻은 후에 뜻이 높아진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로써 이와 같이 화양(華陽)의 영지(靈地)가 있으며, 그런 후에 이와 같은 선생의 덕의(德義)가 있는 것이니, 즉 고인이 일컫기를 인걸지령(“人傑地靈)은 이런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했다. 화양이 산천이 된 것은 선생으로 하여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경천벽(擎天壁)7)이 경천벽이 된것과, 운영담(雲影潭)8)이 운영담이 된 것과, 금사담(金沙潭)9)이 금사담이 된
것과, 읍궁암(泣弓巖)10)이 읍궁암이 된 것과, 첨성대(瞻星臺)11)가 첨성대가 된 것과 능운대(凌雲臺12)가 능운대가 된 것과, 학소대(鶴巢臺)13)가 학소대가 된 것과, 와룡암(臥龍巖)14)이 와룡암이 된 것과, 파곶(巴串)15)이 파곶이 된 것은 선생이 사물에 드러내 말을 이루지 않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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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윤정학(尹正學 1867~1933) 2)1703년 세움~1942년 철거 3)명나라 4)
송시열(宋時烈) 5)권상하(權尙夏) 6)송시열(宋時烈). [화양9곡 7)1곡.
8)2곡. 9)3곡. 10)4곡. 11)5곡. 12)6곡. 13)7곡. 14)8곡. 15)단양우씨 유지







1. 우현빈 불망비(禹顯斌 不忘碑)
2. 효자 증 사헌부 감찰 우효동 비(孝子 贈 司憲府 監察 禹孝東 碑)
3. 우정규 송덕비(禹政圭 頌德碑
4. 우순 송덕비(禹淳 頌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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